전직 ‘호모’가 관계역학에 대해 말하다
1
하여간 난 여자가 너무 좋았다.
마른 여자, 뚱뚱한 여자, 머리 짧은 여자, 머리 긴 여자, 미술하는 여자, 음악하는 여자 (놀랍게도 예술을 안하는 여자를 만나본 적이 없다!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미친 씨네필 여자, 미친 오타쿠 여자, 페미니스트 혹은 정치적 냉소주의자, 꽤 엄격한 비건-여자, 고기와 빵에 미친 여자, 팔뚝질하는 여자와 “난 시위 그런거 잘 몰라. 좀 그래, 자기는?” 하고 되묻는 여자, 집이 부자여서 금전 감각이라고 눈꼽만큼도 없는 여자 (데이트 비용은 주로 내가 지불했다. 국가근로와 알바를 해서 번 돈으로), 쓰리잡을 뛰느라 항상 지쳐있는 여자, 그리고 각종 정신병을 앓는 여자, 약을 먹는 여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씩씩하게 살아가는 여자, 여자들.
20대 내내 나는 그런 여자들을 만났다. 그들을 만나기 위해 어플을 돌렸고, 교내 퀴어동아리에 가입했고, 레즈비언 오픈 카톡방을 기웃거렸다. 여자친구를 사귀고, 입을 맞추겠다고. 여태까지 모르는 사이로 지내왔던 여자와 한두 달내로 빠르게 가까워져서 영원을 약속하겠다고. 그리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가지는 꿈을, 난자-난자 결합에 대한 원대한 꿈을, 거기까진 아니더라도 한 집에서 살면서 된장찌개를 끓여먹고 함께 빨래를 개자는 꿈을. 비록 우리 통장 잔고를 합쳐도 천만 원이 안될지라도. 꿈은 원대할수록 좋으니까. 그렇다면 포지션을 정해야한다. 누가 남편이 될 것인가? 아무래도 머리짧은 언니쪽이다. 그러니까... 나다.
남편인데, 언니고, 엄마인데, 주인님. 이 당혹스러움. 이내 예쁘고 귀여운 여자애들이 나를 원한다는 것에서 오는 인정중독. 아이를 반복적으로 낳는 여자들처럼, 나에게 정서적으로 의존하는 타인을 갖는다는 것에 나는 중독되었다. 하지만 내가 어떻게 남편이 될 수 있겠어? 그건 단순히 생물학적인 문제가 아니라, 내가 비-남성적인 방식으로 사고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남자들만큼 여자들을 안정시킬 수는 없으면서 여자들만큼 복잡하고, 섬세하지도 않은 이도저도 아닌 존재라는게 문제였다. 그리고 어쨌든 나는 그녀들과 나의 관계가 평등하지 않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왜냐하면 그녀들의 욕망 이상으로 내가 욕망을 가지는게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녀들은 탐욕스러운 테이커였다. 내가 원하는걸 그녀들이 직접적으로 주지 않지만, 내가 그녀들에게 줌으로써 나는 간접적으로 내가 원하는 것을 얻었다. 그러니까 난 시궁쥐처럼 그녀 욕망의 부스러기를 주워먹었다.
서브미시브-마조히스트인 그녀들과 합의한 것을 바탕으로 원하는 범위까지만 그녀들을 때리고, 괴롭히고, 지배하고, 꽉 껴안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녀들의 체취를 꼼꼼히 다 삼키고, 그녀들의 솜털 보송보송한 볼에 흘러내리는 눈물을 모조리 핥으면서. 그들을 온 마음을 다해서 사랑함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 어딘가에 채워지지 않은 무언가가 있는 것을 자꾸 느꼈다. 그 공허가 나를 불편하게 만들어서 그걸 피하기 위해 그녀들을 꽉 껴안곤 했다. 이렇게 많은 걸 나누고, 이렇게 사랑받고 사랑하는데, 욕망이 다 해결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나를 죄책감에 빠뜨렸기 때문이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데, 근데 너와 하는 섹스가 날 약간은 공허하게 한다고. 어딘가가 심히 뒤틀린거 아닌가. 좀 더 다양한, 다른 시도가 필요한 것인가. 그 사실이 나를 슬프게 해서 그녀와 헤어지고 집에 가는 길에 조금 울었다. 사랑으론 모조리 해결되지 않는 욕망이 내게 있다는 사실이 슬펐는데, 그게 뭔지도 정확히 모르겠다는게 두려웠다. 그리고 그들은 이런 내 불안정함이 욕망의 문제가 아니라 다른 요인이라고 생각했으며 우리는 그걸 고치기 위해 많은, 깊은 대화들을 정말 오래도록 나눴다. 답이 나오지않는, 끝없는 대화. 나의 충분히 부치스럽지 않은 면모에 당황하는 그녀들. 내가 고정되어있지 않은 존재라는 것에 나와 함께 흔들거리는 여자들.
그리고 나는 충분히 유약할만한 자유가 없다는 피해의식에 사로잡혔다. 동시에 나는 여자에게 거절당했다는 이유 하나로 총을 쐈다는 어떤 남자들에 대해 강렬한 혐오감을 느꼈다. 여자에게 거절당하는게 문제라고? 남자답게 정신차려라. 여자가 당신을 받아들인 이후에 당신한테 무엇을 얼만큼 원하는지를 알게되면 당신은 여자에게 질려버릴걸. 그만큼 줄 용기도 없는 주제에 거절당했다고 상처를 입다니. 당신이 덜떨어지는 수컷냄새를 풍기는걸 그녀들은 진작에 알아챘겠지. 당신은 늘 남자일 수 있어? 그녀들이 원하는 만큼 늘 남자일 수 있어? 나는 그녀들이 원하는 만큼의 뭔가가 되는 데에 계속 실패했는데... 하고 여자의 품 속에서 어떤 불안감에 사로잡혔다. 이게 퀴어여서 겪는 문제인지, 내가 부치가 아닌데 부치행세를 하고 다녀서 겪는 문제인건지, 에세머여서 겪는 문제인지 모르겠는 상황속에서.
2
그리고 나는 졸업했다.
대학을 졸업했고, 여자 만나는 일을 '잠시' 졸업했다. 1년은 시나리오를 팔아보겠다고 애썼고, 1년동안은 그 시간을 메꾸기 위해 혹은 벗어나기 위해 전혀 다른 일을 했다.
내가 팔고자 했던 시나리오는 이런 내용이었다.
사제가 되기 위해 신학교에 재학 중인 청년 ‘요한’. 그는 서품을 앞두고 천주교 병원에서 봉사활동을 하며 신앙을 증명하려 한다. 고요하던 그의 일상은 온몸에 심각한 화상을 입은 한 ‘군인’이 실려 오며 균열이 가기 시작한다. 반항적인 군인은 치료를 거부하며 난동을 부리지만, 요한은 묵묵히 그를 받아낸다. 그가 돌봄을 거부할수록, 요한에게는 그것이 극복해야 할 시련이자, 묘한 흥분을 불러일으키는 자극제가 된다. 군인이 그를 밀어낼수로 요한은 ‘신의 뜻’이라는 명분을 앞세워 그에게 더욱 깊이 파고든다. 어느새 요한의 내면에서는 성직자로서의 윤리적 의무와 금지된 대상에 대한 욕망이 경계없이 뒤섞이기 시작한다. 그때, 군인의 배다른 누나가 병원에 찾아오고, 군인이 화상을 입게 된 사건의 진실을 둘러싼 인물들이 개입하며 요한은 혼란에 빠진다. 군인을 둘러싼 외부의 개입은 요한에게서 군인을 떼어놓으려 하지만, 요한은 결국 군인의 곁에 남기를 선택한다.
몸과 마음의 수난을 겪는 테이커와 그런 그에게 푹 빠져서 모든 걸 바치려는 기버. ‘온깁’으로 거의 30년을 살았으니 내가 누군가에게 감정이입을 했다면 당연히 요한쪽이었을거다. 미스터리하고 불안정한 존재에게 끌리는 마음을 그 무엇보다 잘 아는 것도 나였고. 하지만 한편으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 마음 어딘가에서는 온 몸에 화상을 입은 채 타인의 선의에 무력하게 기대는, 평소라면 굴욕적이라고 느꼈을 수동성을 바랐을 수도 있다는.
누군가는 신을 믿고, 누군가는 침대에 묶이기를 원한다. 복종은 때로는 숭고할 정도로 순수하니까. 나는 그동안 복종을 원하는 타인을 지배했다. 적당할 정도로 폭력적인 섹스를 무사히 잘 마무리하고, 멍든 그들의 허벅지에 멍크림을 발라주고, 상대를 꼬옥 껴안아준다. 나는 그 들이 마치 내 딸인 것처럼 귀여워했고, 그들은 내 품에 안겨서 미주알고주알 오늘 있었던 일이나 자신을 불안하게 했던 일에 대해 모조리 털어놓았다. 나는 성당의 신부처럼 그들이 고해하는 것을 듣고, 그들의 모든 감정을 흡수했다. 나한테 안겨있는 이 여자가 한없이 가엾은 작은 인간이 되어가는 것을 지켜본다. 여자애. 겨우 여자애. 어떻게 이렇게까지 귀여울 수 있을까? 그녀들은 작아지고 작아져서 내 딸이 된다.
그 애가 내 딸인데 그 앞에서 어떻게 내가 강할 수 있지?
나는 여자와의 관계에서 한없이 유약해졌고, 불안정해졌다. 그런 내 모습이 싫었다. 가끔은 나도 쥐고 있는 컨트롤 바를 놓아버리고, 누군가의 밑에서 개운하게 울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눈물을 흘리지 않은 지 꽤 됐다.
시나리오는 결국 팔리지 않았다. 그 후 반년간 시나리오와는 전혀 상관없는 아카데미에 다녔고, 그곳에서 처음으로 남자와 키스를 하게 되었다. 그는 키스하면서 내 가슴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남자의 낯선 단단함, 고양이를 키우던 여자가 처음으로 강아지를 키우게 된 것처럼. 조금은 거친 피부, 눈 앞의 여자를 만지겠다는 것 외엔 아무것도 상관없다는 태도. 당황스러움 대신 될 대로 되라는 마음이 들었다. 드디어 이렇게 ‘탈반’하는 건가? 그러나 그 남자를 사랑하긴 어려웠기에 한 두 번의 키스로 끝났고, 그 일은 잊혀져가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 이후로 종종 남자에 관한 얘기를 했다. 회사를 다니며 이성애자인 척 연기했기 때문이다. (대학교를 오래 다녔고, 대학을 다니면서는 프리랜서로 일을 했기에 나는 편하게 파워-오픈리-레즈비언으로 살 수 있었다.) 이성애자인 내 친구들은 남자경험을 조금이라도 하게 된 나를 흥미로워했다. 나는 이번 경험도 20대 내내 이것저것 해보던 성적실천의 연장선상처럼 느꼈다. 나는 내가 남자를 사랑할 수 있는지 궁금했다. 사실 이 궁금증은 꽤 오래되었는데, 나의 ‘역할’에 꽤 지쳐있었기 떄문이다. 나는 나의 역할을 완전히 새롭게 개편하려면 ‘남자’가 필요하다고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러니까... 보편적 남자라는 것 말이다. provider, giver로서의 남자. 왜 티부를 만나지 않았냐고? 그들에게서 과거의 나를 발견하게 되니까. 그게 나한테 고통을 줄 거라는 사실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으니까. 나와는 다른 존재가 필요했다. 그리고 필요함이 욕망으로 이어지는 데까지는 시간이 꽤 걸렸다.
3
남자친구의 깎은지 얼마 안된 까슬한 뒷통수를 쓰다듬으며 생각했다. 나는 과연 이 남자에 대해 낱낱이 알고싶은가? 그의 머리 뒤쪽에는 커다란 흉터가 있다. 그가 과거에 큰 수술을 했다는 흔적. 그의 MBTI는 ISTJ고, 그는 나와 똑같이 5번의 연애를 거쳤다. 루틴화된 삶을 즐기고 고구마를 좋아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는 나를 사랑한다. 이 이상 내가 그에 대해 알아야할 것이 뭐지? 그의 냄새를 맡고, 입을 맞추고, 가볍고 재밌는 대화를 나누는 것 외에 내가 그와 무엇을 더 해야하나? 우린 이대로 너무 좋고, 괜찮다. 가슴이 약간 간지러운 정도로도 충분하다.
과거의 연애를 돌이켜보면, 나는 여자들이 품고있는 심연의 진실을 낱낱이 파헤치려 했다. 두려웠다. 그녀들이 날 떠날까봐, 섹스에서 만족하지 못할까 봐, 나를 사랑하지 않게 될까봐 불안해서 그녀들의 내면을 파헤치려 들었다. 하지만 서른이 되면서 깨달았다. 진실에도 어제와 오늘, 내일이 존재하는 것, 특히 욕망에 관한 진실은 더더욱 그렇다는 것을. 심지어 그 진실을 말로 들어 아는 건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건 지금 당장 나를 바라보는 그 사람의 눈동자가 무엇을 말하고 있느냐다.
이제 나는 이리저리 뒤섞인 욕망들을 억지로 정상화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 그저 내버려두고 바라보는 상태가 만족스럽다. 그러니까 나는 욕망하는 만큼 욕망 당하고 싶었을 뿐이다.
남자친구와 나의 관계는 시소 타기같다. 내가 누르는 만큼 상대방도 튀어 오른다. 내가 그의 목을 조르는 만큼 그가 내 목을 졸라주는 것. 나는 이 관계가 아주 평등했으면 좋겠다. 우리가 ‘평등’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지 않아도 유지되는, 아주 팽팽한 평등. 밀고 당기고 엎치락 뒤치락하는 기분좋은 긴장감.
어째서 이 남자와는 평등한 관계가 가능한 걸까. 그가 남자이기 때문에? 혹은 그가 자기 삶을 건사할 줄 알고, 연애할 때 아빠처럼 구는 어른이라서? 아니면 우리가 도플갱어처럼 도미넌트한 면과 서브미시브한 면을 7:3 정도로 비슷하게 가진 인간들이어서? 그것도 아니면 그가 나보다 더 백지같은 사람이어서 나에게 맞춰주는 걸까? 이유는 알 수 없다.
어쩌면 우리가 ‘같은 부류’ 라서 그럴지도 모른다. 나처럼 그 또한 과거에 끊임없이 사랑을 증명해달라고 애정을 요구하는 연인을 만났던 경험이 있으니까. 그런 지난한 과거를 공유하고 있기에 우리는 더 이상 사랑에 전부를 걸지 않는다. 그가 농담처럼 얘기하는 ‘사랑은 정신병’이라는 개념을 함께 웃어넘기고, 대화는 합리적으로, 포옹은 뜨겁게 나눈다. 함께 미래를 꿈꾸고 재정상태를 합리적으로 꾸려나가는 것. 이 건조하고도 단단한 결속. 더 나아가 그는 아이를 가지고 싶어한다. 그도 건강하고 나도 너무나 건강해서 난자-난자 결합이라는 원대한 꿈을 꾸지 않아도 된다. 라텍스 한 장 덜어낸 섹스 한 번으로, 미래는 아주 가깝고 쉬운 것이 되어버린다.
이 관계 안에서라면 그도 약간은 나의 아내가 되어줄 수 있겠지. 그가 나와 남편의 역할을 반씩 나눠가진 것처럼. 가뿐한 마음으로 탈반이라든가, 배신이라든가. 신념, 분노, 20대에 집착했었던 단어들을 오줌과 함께 변기에 넣고 모조리 내려버렸다. 남성성에 대한 공포와 여성성에 대한 불안마저도 날려버렸다. 내 몸을 맴돌던 수치심 또한 없다. 이건 제대로 사랑받고 싶은 마음의 문제가 아니라, 무엇으로 존재하는가에 대한 문제였다는 걸 이제야 깨닫는다.
남자친구는 습관처럼 “너가 너무 좋아. 네가 전부 좋아.”라고 얘기한다. 그러면 모든게 단순해진다. 그는 그냥 내 전부를 좋아하는 사람이 되고, 나는 의심없이 그 사랑을 받아들인다. 이 관계에서 내 존재는 단순해진다. 나는 여자가 된다. 나는 여기서 주인님이 될 필요도, 언니나 엄마가 될 필요도 없다. 그가 남자이기 때문에 나는 여자가 된다. 이 단순한 이분법이 모든걸 깔끔하게 종결시킨다. 아, 애인의 손을 잡고 걷다보면 내가 지극히 평범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좋다. 물론 이게 영원할거라 생각하진 않는다. 이 관계에서는 이 관계만의 문제들이 또 생기겠지. 근데 그러면 뭐 어때. 나는 이제 친구들과 계절마다 제철 음식을 챙겨먹고, 내 몸을 부끄러워하지 않은 채로 애인과 실컷 섹스하려고 한다. 이제 모든게 그걸로 충분하다.
요한
건조하고 뜨거운 글을 쓰고 싶은 사람.
에세이와 시나리오를 씁니다.
인스타그램 @yohantxt
* 신여성 프로그램 <치명적 에세이 쓰기 13기>에서 나눈 글입니다.
전직 ‘호모’가 관계역학에 대해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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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간 난 여자가 너무 좋았다.
마른 여자, 뚱뚱한 여자, 머리 짧은 여자, 머리 긴 여자, 미술하는 여자, 음악하는 여자 (놀랍게도 예술을 안하는 여자를 만나본 적이 없다!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미친 씨네필 여자, 미친 오타쿠 여자, 페미니스트 혹은 정치적 냉소주의자, 꽤 엄격한 비건-여자, 고기와 빵에 미친 여자, 팔뚝질하는 여자와 “난 시위 그런거 잘 몰라. 좀 그래, 자기는?” 하고 되묻는 여자, 집이 부자여서 금전 감각이라고 눈꼽만큼도 없는 여자 (데이트 비용은 주로 내가 지불했다. 국가근로와 알바를 해서 번 돈으로), 쓰리잡을 뛰느라 항상 지쳐있는 여자, 그리고 각종 정신병을 앓는 여자, 약을 먹는 여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씩씩하게 살아가는 여자, 여자들.
20대 내내 나는 그런 여자들을 만났다. 그들을 만나기 위해 어플을 돌렸고, 교내 퀴어동아리에 가입했고, 레즈비언 오픈 카톡방을 기웃거렸다. 여자친구를 사귀고, 입을 맞추겠다고. 여태까지 모르는 사이로 지내왔던 여자와 한두 달내로 빠르게 가까워져서 영원을 약속하겠다고. 그리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가지는 꿈을, 난자-난자 결합에 대한 원대한 꿈을, 거기까진 아니더라도 한 집에서 살면서 된장찌개를 끓여먹고 함께 빨래를 개자는 꿈을. 비록 우리 통장 잔고를 합쳐도 천만 원이 안될지라도. 꿈은 원대할수록 좋으니까. 그렇다면 포지션을 정해야한다. 누가 남편이 될 것인가? 아무래도 머리짧은 언니쪽이다. 그러니까... 나다.
남편인데, 언니고, 엄마인데, 주인님. 이 당혹스러움. 이내 예쁘고 귀여운 여자애들이 나를 원한다는 것에서 오는 인정중독. 아이를 반복적으로 낳는 여자들처럼, 나에게 정서적으로 의존하는 타인을 갖는다는 것에 나는 중독되었다. 하지만 내가 어떻게 남편이 될 수 있겠어? 그건 단순히 생물학적인 문제가 아니라, 내가 비-남성적인 방식으로 사고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남자들만큼 여자들을 안정시킬 수는 없으면서 여자들만큼 복잡하고, 섬세하지도 않은 이도저도 아닌 존재라는게 문제였다. 그리고 어쨌든 나는 그녀들과 나의 관계가 평등하지 않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왜냐하면 그녀들의 욕망 이상으로 내가 욕망을 가지는게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녀들은 탐욕스러운 테이커였다. 내가 원하는걸 그녀들이 직접적으로 주지 않지만, 내가 그녀들에게 줌으로써 나는 간접적으로 내가 원하는 것을 얻었다. 그러니까 난 시궁쥐처럼 그녀 욕망의 부스러기를 주워먹었다.
서브미시브-마조히스트인 그녀들과 합의한 것을 바탕으로 원하는 범위까지만 그녀들을 때리고, 괴롭히고, 지배하고, 꽉 껴안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녀들의 체취를 꼼꼼히 다 삼키고, 그녀들의 솜털 보송보송한 볼에 흘러내리는 눈물을 모조리 핥으면서. 그들을 온 마음을 다해서 사랑함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 어딘가에 채워지지 않은 무언가가 있는 것을 자꾸 느꼈다. 그 공허가 나를 불편하게 만들어서 그걸 피하기 위해 그녀들을 꽉 껴안곤 했다. 이렇게 많은 걸 나누고, 이렇게 사랑받고 사랑하는데, 욕망이 다 해결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나를 죄책감에 빠뜨렸기 때문이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데, 근데 너와 하는 섹스가 날 약간은 공허하게 한다고. 어딘가가 심히 뒤틀린거 아닌가. 좀 더 다양한, 다른 시도가 필요한 것인가. 그 사실이 나를 슬프게 해서 그녀와 헤어지고 집에 가는 길에 조금 울었다. 사랑으론 모조리 해결되지 않는 욕망이 내게 있다는 사실이 슬펐는데, 그게 뭔지도 정확히 모르겠다는게 두려웠다. 그리고 그들은 이런 내 불안정함이 욕망의 문제가 아니라 다른 요인이라고 생각했으며 우리는 그걸 고치기 위해 많은, 깊은 대화들을 정말 오래도록 나눴다. 답이 나오지않는, 끝없는 대화. 나의 충분히 부치스럽지 않은 면모에 당황하는 그녀들. 내가 고정되어있지 않은 존재라는 것에 나와 함께 흔들거리는 여자들.
그리고 나는 충분히 유약할만한 자유가 없다는 피해의식에 사로잡혔다. 동시에 나는 여자에게 거절당했다는 이유 하나로 총을 쐈다는 어떤 남자들에 대해 강렬한 혐오감을 느꼈다. 여자에게 거절당하는게 문제라고? 남자답게 정신차려라. 여자가 당신을 받아들인 이후에 당신한테 무엇을 얼만큼 원하는지를 알게되면 당신은 여자에게 질려버릴걸. 그만큼 줄 용기도 없는 주제에 거절당했다고 상처를 입다니. 당신이 덜떨어지는 수컷냄새를 풍기는걸 그녀들은 진작에 알아챘겠지. 당신은 늘 남자일 수 있어? 그녀들이 원하는 만큼 늘 남자일 수 있어? 나는 그녀들이 원하는 만큼의 뭔가가 되는 데에 계속 실패했는데... 하고 여자의 품 속에서 어떤 불안감에 사로잡혔다. 이게 퀴어여서 겪는 문제인지, 내가 부치가 아닌데 부치행세를 하고 다녀서 겪는 문제인건지, 에세머여서 겪는 문제인지 모르겠는 상황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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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나는 졸업했다.
대학을 졸업했고, 여자 만나는 일을 '잠시' 졸업했다. 1년은 시나리오를 팔아보겠다고 애썼고, 1년동안은 그 시간을 메꾸기 위해 혹은 벗어나기 위해 전혀 다른 일을 했다.
내가 팔고자 했던 시나리오는 이런 내용이었다.
사제가 되기 위해 신학교에 재학 중인 청년 ‘요한’. 그는 서품을 앞두고 천주교 병원에서 봉사활동을 하며 신앙을 증명하려 한다. 고요하던 그의 일상은 온몸에 심각한 화상을 입은 한 ‘군인’이 실려 오며 균열이 가기 시작한다. 반항적인 군인은 치료를 거부하며 난동을 부리지만, 요한은 묵묵히 그를 받아낸다. 그가 돌봄을 거부할수록, 요한에게는 그것이 극복해야 할 시련이자, 묘한 흥분을 불러일으키는 자극제가 된다. 군인이 그를 밀어낼수로 요한은 ‘신의 뜻’이라는 명분을 앞세워 그에게 더욱 깊이 파고든다. 어느새 요한의 내면에서는 성직자로서의 윤리적 의무와 금지된 대상에 대한 욕망이 경계없이 뒤섞이기 시작한다. 그때, 군인의 배다른 누나가 병원에 찾아오고, 군인이 화상을 입게 된 사건의 진실을 둘러싼 인물들이 개입하며 요한은 혼란에 빠진다. 군인을 둘러싼 외부의 개입은 요한에게서 군인을 떼어놓으려 하지만, 요한은 결국 군인의 곁에 남기를 선택한다.
몸과 마음의 수난을 겪는 테이커와 그런 그에게 푹 빠져서 모든 걸 바치려는 기버. ‘온깁’으로 거의 30년을 살았으니 내가 누군가에게 감정이입을 했다면 당연히 요한쪽이었을거다. 미스터리하고 불안정한 존재에게 끌리는 마음을 그 무엇보다 잘 아는 것도 나였고. 하지만 한편으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 마음 어딘가에서는 온 몸에 화상을 입은 채 타인의 선의에 무력하게 기대는, 평소라면 굴욕적이라고 느꼈을 수동성을 바랐을 수도 있다는.
누군가는 신을 믿고, 누군가는 침대에 묶이기를 원한다. 복종은 때로는 숭고할 정도로 순수하니까. 나는 그동안 복종을 원하는 타인을 지배했다. 적당할 정도로 폭력적인 섹스를 무사히 잘 마무리하고, 멍든 그들의 허벅지에 멍크림을 발라주고, 상대를 꼬옥 껴안아준다. 나는 그 들이 마치 내 딸인 것처럼 귀여워했고, 그들은 내 품에 안겨서 미주알고주알 오늘 있었던 일이나 자신을 불안하게 했던 일에 대해 모조리 털어놓았다. 나는 성당의 신부처럼 그들이 고해하는 것을 듣고, 그들의 모든 감정을 흡수했다. 나한테 안겨있는 이 여자가 한없이 가엾은 작은 인간이 되어가는 것을 지켜본다. 여자애. 겨우 여자애. 어떻게 이렇게까지 귀여울 수 있을까? 그녀들은 작아지고 작아져서 내 딸이 된다.
그 애가 내 딸인데 그 앞에서 어떻게 내가 강할 수 있지?
나는 여자와의 관계에서 한없이 유약해졌고, 불안정해졌다. 그런 내 모습이 싫었다. 가끔은 나도 쥐고 있는 컨트롤 바를 놓아버리고, 누군가의 밑에서 개운하게 울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눈물을 흘리지 않은 지 꽤 됐다.
시나리오는 결국 팔리지 않았다. 그 후 반년간 시나리오와는 전혀 상관없는 아카데미에 다녔고, 그곳에서 처음으로 남자와 키스를 하게 되었다. 그는 키스하면서 내 가슴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남자의 낯선 단단함, 고양이를 키우던 여자가 처음으로 강아지를 키우게 된 것처럼. 조금은 거친 피부, 눈 앞의 여자를 만지겠다는 것 외엔 아무것도 상관없다는 태도. 당황스러움 대신 될 대로 되라는 마음이 들었다. 드디어 이렇게 ‘탈반’하는 건가? 그러나 그 남자를 사랑하긴 어려웠기에 한 두 번의 키스로 끝났고, 그 일은 잊혀져가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 이후로 종종 남자에 관한 얘기를 했다. 회사를 다니며 이성애자인 척 연기했기 때문이다. (대학교를 오래 다녔고, 대학을 다니면서는 프리랜서로 일을 했기에 나는 편하게 파워-오픈리-레즈비언으로 살 수 있었다.) 이성애자인 내 친구들은 남자경험을 조금이라도 하게 된 나를 흥미로워했다. 나는 이번 경험도 20대 내내 이것저것 해보던 성적실천의 연장선상처럼 느꼈다. 나는 내가 남자를 사랑할 수 있는지 궁금했다. 사실 이 궁금증은 꽤 오래되었는데, 나의 ‘역할’에 꽤 지쳐있었기 떄문이다. 나는 나의 역할을 완전히 새롭게 개편하려면 ‘남자’가 필요하다고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러니까... 보편적 남자라는 것 말이다. provider, giver로서의 남자. 왜 티부를 만나지 않았냐고? 그들에게서 과거의 나를 발견하게 되니까. 그게 나한테 고통을 줄 거라는 사실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으니까. 나와는 다른 존재가 필요했다. 그리고 필요함이 욕망으로 이어지는 데까지는 시간이 꽤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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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친구의 깎은지 얼마 안된 까슬한 뒷통수를 쓰다듬으며 생각했다. 나는 과연 이 남자에 대해 낱낱이 알고싶은가? 그의 머리 뒤쪽에는 커다란 흉터가 있다. 그가 과거에 큰 수술을 했다는 흔적. 그의 MBTI는 ISTJ고, 그는 나와 똑같이 5번의 연애를 거쳤다. 루틴화된 삶을 즐기고 고구마를 좋아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는 나를 사랑한다. 이 이상 내가 그에 대해 알아야할 것이 뭐지? 그의 냄새를 맡고, 입을 맞추고, 가볍고 재밌는 대화를 나누는 것 외에 내가 그와 무엇을 더 해야하나? 우린 이대로 너무 좋고, 괜찮다. 가슴이 약간 간지러운 정도로도 충분하다.
과거의 연애를 돌이켜보면, 나는 여자들이 품고있는 심연의 진실을 낱낱이 파헤치려 했다. 두려웠다. 그녀들이 날 떠날까봐, 섹스에서 만족하지 못할까 봐, 나를 사랑하지 않게 될까봐 불안해서 그녀들의 내면을 파헤치려 들었다. 하지만 서른이 되면서 깨달았다. 진실에도 어제와 오늘, 내일이 존재하는 것, 특히 욕망에 관한 진실은 더더욱 그렇다는 것을. 심지어 그 진실을 말로 들어 아는 건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건 지금 당장 나를 바라보는 그 사람의 눈동자가 무엇을 말하고 있느냐다.
이제 나는 이리저리 뒤섞인 욕망들을 억지로 정상화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 그저 내버려두고 바라보는 상태가 만족스럽다. 그러니까 나는 욕망하는 만큼 욕망 당하고 싶었을 뿐이다.
남자친구와 나의 관계는 시소 타기같다. 내가 누르는 만큼 상대방도 튀어 오른다. 내가 그의 목을 조르는 만큼 그가 내 목을 졸라주는 것. 나는 이 관계가 아주 평등했으면 좋겠다. 우리가 ‘평등’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지 않아도 유지되는, 아주 팽팽한 평등. 밀고 당기고 엎치락 뒤치락하는 기분좋은 긴장감.
어째서 이 남자와는 평등한 관계가 가능한 걸까. 그가 남자이기 때문에? 혹은 그가 자기 삶을 건사할 줄 알고, 연애할 때 아빠처럼 구는 어른이라서? 아니면 우리가 도플갱어처럼 도미넌트한 면과 서브미시브한 면을 7:3 정도로 비슷하게 가진 인간들이어서? 그것도 아니면 그가 나보다 더 백지같은 사람이어서 나에게 맞춰주는 걸까? 이유는 알 수 없다.
어쩌면 우리가 ‘같은 부류’ 라서 그럴지도 모른다. 나처럼 그 또한 과거에 끊임없이 사랑을 증명해달라고 애정을 요구하는 연인을 만났던 경험이 있으니까. 그런 지난한 과거를 공유하고 있기에 우리는 더 이상 사랑에 전부를 걸지 않는다. 그가 농담처럼 얘기하는 ‘사랑은 정신병’이라는 개념을 함께 웃어넘기고, 대화는 합리적으로, 포옹은 뜨겁게 나눈다. 함께 미래를 꿈꾸고 재정상태를 합리적으로 꾸려나가는 것. 이 건조하고도 단단한 결속. 더 나아가 그는 아이를 가지고 싶어한다. 그도 건강하고 나도 너무나 건강해서 난자-난자 결합이라는 원대한 꿈을 꾸지 않아도 된다. 라텍스 한 장 덜어낸 섹스 한 번으로, 미래는 아주 가깝고 쉬운 것이 되어버린다.
이 관계 안에서라면 그도 약간은 나의 아내가 되어줄 수 있겠지. 그가 나와 남편의 역할을 반씩 나눠가진 것처럼. 가뿐한 마음으로 탈반이라든가, 배신이라든가. 신념, 분노, 20대에 집착했었던 단어들을 오줌과 함께 변기에 넣고 모조리 내려버렸다. 남성성에 대한 공포와 여성성에 대한 불안마저도 날려버렸다. 내 몸을 맴돌던 수치심 또한 없다. 이건 제대로 사랑받고 싶은 마음의 문제가 아니라, 무엇으로 존재하는가에 대한 문제였다는 걸 이제야 깨닫는다.
남자친구는 습관처럼 “너가 너무 좋아. 네가 전부 좋아.”라고 얘기한다. 그러면 모든게 단순해진다. 그는 그냥 내 전부를 좋아하는 사람이 되고, 나는 의심없이 그 사랑을 받아들인다. 이 관계에서 내 존재는 단순해진다. 나는 여자가 된다. 나는 여기서 주인님이 될 필요도, 언니나 엄마가 될 필요도 없다. 그가 남자이기 때문에 나는 여자가 된다. 이 단순한 이분법이 모든걸 깔끔하게 종결시킨다. 아, 애인의 손을 잡고 걷다보면 내가 지극히 평범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좋다. 물론 이게 영원할거라 생각하진 않는다. 이 관계에서는 이 관계만의 문제들이 또 생기겠지. 근데 그러면 뭐 어때. 나는 이제 친구들과 계절마다 제철 음식을 챙겨먹고, 내 몸을 부끄러워하지 않은 채로 애인과 실컷 섹스하려고 한다. 이제 모든게 그걸로 충분하다.
요한
건조하고 뜨거운 글을 쓰고 싶은 사람.
에세이와 시나리오를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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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여성 프로그램 <치명적 에세이 쓰기 13기>에서 나눈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