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ING

신여성 멤버들의 글을 소개합니다.

에세이/르포계단 크루 (배윤민정)

계단 크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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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기에 가출한 다음에 내가 자주 머물렀던 공간은 계단이다. 번호키가 없는 아파트, 혹은 번호키가 있어도 낮엔 문을 열어놓은 아파트가 주로 내가 찾는 곳이었다. 아파트 꼭대기층에서 한 층 더 올라가면 옥상이 나오기 마련인데, 이렇게 옥상으로 연결되는 계단엔 오가는 사람이 드물었다. 달리 가야할 장소도 없고, 돈이 들지도 않았기 때문에 나는 계단과 계단 사이, 사람 한 명이 쭈그리고 누울 수 있을 만한 공간에 신문지를 깔고 쪽잠을 잤다. 잠이 오지 않으면 멍하니 눈만 깜빡였다.


21세기가 막 시작될 무렵이었다. 핸드폰으로 통화나 메시지는 주고 보내도, 인터넷은 할 수 없던 시절이라서 달리 시간을 떼울 거리가 없었다. 설령 스마트폰을 쓸 수 있었다고 해도 데이터가 아까워서 웹서핑을 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그때 나는 핸드폰의 통화 시간이나 문자메시지를 최대한 아끼려 했다.


집이 없다는 건 여분이 없다는 의미다. 지금 당장 내가 걸친 것, 내 가방 속에 있는 것 외에는 정말이지 아무것도 없다. 내 것을 보관해놓은 장소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 며칠 지나지 않았는데도 나는 집 없이 사는 법을 빠르게 습득해갔다. 나에게 주어진 것은 최대한 천천히 소모하고, 뜻밖에 주어지는 기회는 최대한 활용해야 잘 살 수 있었다. 예컨대 조건만남으로 만난 사람이 밥을 사주면 배가 터질 것 같아도 두 끼 정도는 한꺼번에 먹어두기. 모텔에서 밤을 보내게 되면 아무리 귀찮아도 속옷을 세탁하고 드라이기로 말려서 입기.


아파트 계단은 서늘하고 고요했다. 낯선 아파트의 계단에 누워 있으면 완전히 혼자라는 기분이 들었다. 그건 마냥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누군가 갑자기 옥상쪽 계단으로 올라올까봐 완전히 마음을 놓고 있진 않았지만, 그래도 원가족과 함께 살던 집에서 보낸 시간에 비하면 마음이 편한 상태였다. 언제 가족들의 비난과 구타가 시작될지 두려워서 마음을 졸이고 있던 상태에 피하면 천국 같은 평화였다.


어떨 때는 웃기기도 했다. 아파트 꼭대기층에 사는 사람들은 말이야, 이 위에 내가 누워 있는 걸 꿈에도 모르겠지? 때로는 아파트 주민이 현관문을 여닫는 소리가 들렸다. 같은 건물에 있으면서 그는 문을 열고 ‘집’과 ‘방’으로 들어가고, 나는 계단에 있다는 사실이 이상했다. 살아서 유령이 된 것 같았다. 아니다. 차라리 유령이었음 더 편안했을 것이다. 누구도 나를 볼 수 없다면 아무것도 걱정할 필요가 없을 텐데. 왜 네가 여기 있냐고 아무도 묻지 않을 텐데. 계단에 누워 있다가 자세를 바꿀 때 바스락거리는 신문지 소리가 날까 봐 숨을 죽인 채 천천히 움직이지 않아도 되고. 모텔에서 눈을 떴을 때 체크아웃 시간을 의식하며 내가 여기 머무를 수 있는 시간이 모래시계처럼 줄어드는 기분을 느끼지 않아도 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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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십여 년이 흐른 다음에 나는 신여성에서 만난 사람1과 대화를 나누다가, 그가 청소년기에 가출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됐다. 

“그땐 집이 없으니까 계단에서 자고 그랬잖아.”

그의 말을 듣는 순간 격한 반가움에 휩싸였다. 어째서 사람들은 공통 경험이 있는 사람을 만나고 싶어할까? 당신과 내가 비슷한 경험을 했다는 것만으로 특별한 사이가 되는 것도 아닌데. 있었던 일들이 사라지지도 않는데.


과거, 현재, 미래 중에 바꿀 수 있는 건 과거뿐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다.2 흔히 과거에 일어난 일은 바뀔 수 없는 현실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저마다 내면에서 어떤 관점으로 이야기를 만드느냐에 따라 자신의 과거를 전혀 다른 방식으로 받아들이게 된다는 뜻이다. 나는 내 이야기를 다시 쓰고 싶었다. 신여성에서 사람들과 글을 쓰고 나누면서 점점 더 나의 바람을 또렷하게 깨닫게 되었다. 나와 비슷한 경험을 했던 사람을 만나면 계단에서 잠들던 시기를 다시 편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를 테면 아파트 계단에 여자아이가 누워 있는 장면을 두고 “이 아이는 완전히 혼자였다”라고 설명하는 대신에 다른 내레이션을 넣는 거다.


“지금은 모르지만, 꿈에도 상상해본 적이 없지만, 이 아이는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 글 쓰는 사람들이 오는 공간을 만들게 될 것이다. 그곳에서 자신의 상처를 글로 바꾸는 작업을 하는 사람들을 만날 것이다. 돈 받고 섹스를 하거나, 자살을 시도하거나, 음식을 먹고 토해보거나, 칼로 피부를 그으며 안도하는 사람들. 타인이 간절히 필요했을 때 혼자였던 사람들. 가장 사랑했던 사람을 떠나보내거나, 가장 이해받고 싶었던 사람에게서 외면당한 경험이 있는 사람들. 물론 계단에서 잤던 사람도 있을 것이다. 심지어 한 명도 아닌 여러 명이라서, 이 아이는 그들에게 남몰래 ‘계단 크루’라는 별명을 붙여줄 것이다. 이 아이는 외롭고 무서웠던 나날의 경험 덕분에 타인의 삶에 공명할 수 있을 것이다. 멍자국이 다리를 놓아줄 것이다. 돈 받고 섹스를 하고, 자살을 시도하고, 음식을 먹고 토해보고, 칼로 피부를 그어본 적이 있어서 다행이라고 안도하게 될 것이다.”



1 이정식, (시각예술가, '시선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저자)

2 언지, <팟캐스트 '에세이클럽' 33화 - 나를 죽이지 않을 것이다>에서. https://youtu.be/gpzamR37cdI?si=goInobuZkFCFt040 


배윤민정

신여성 운영자, 에세이 작가. 사회의 통념에서 어긋나는 이야기, 다수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이야기를 쓰는 이들에게 애정을 품고 있다. 인스타그램 @bae_yun_minjeong


* 이 글은 청소년성/노동연대 부라자 친구들과 함께했던 글쓰기 모임에서 시작되어서, 이후 신여성의 여러 글쓰기 모임 친구들과 대화하며 조금씩 덧대어졌습니다.